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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에드워드 Eadweard 리뷰

by 김유로01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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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영사기를 최초로 구상하고 만들어낸 에드워드라는 한 예술가의 삶을 비춘다. 영화를 공부하고 있는 입장으로 영화가 탄생하게 되는 기반이 등장하는 매우 흥미로운 영화였다. 영화는 우선 전체적으로 색감이 부드럽고 밝아서 마치 수채화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에드워드의 시선 속에서 모든 것들의 순간순간이 마치 카메라로 연속 촬영을 한 듯 보이는 것도 그의 머릿속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아 신선하게 느껴졌다.

 

영사기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달리는 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심지어는 예전 택시의 미터기에도 달리는 말이 있었던 것을 보면 에드워드의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에드워드가 떨어지는 마차 속에서 달리는 말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만들어보고 싶소. 사후 세계가 있어요. 내 자식들이 있고 그것은 영원하죠.’ 에드워드가 신문 기자에게 말하는 대사이다. 그가 가진 열망의 원천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아무도 창조하지 않은 예술을 갈구하고 욕망한다. 자신의 작품이 위대한 예술이 될 것이라는 자부심 또한 굉장하다. 자신의 결과물을 보고 그것이 어떠한지 판단하는 능력도 빠르고 그것에 실행하는 능력도 또한 뛰어나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못하고 그저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둥 이해하려 하지도 않지만 그는 그저 외로이 자신만의 예술을 믿고 묵묵히 행할 뿐이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때의 비참함은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아내가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도 그는 오로지 예술뿐이었다. 그의 아내가 아기라는 새 생명을 출산하였을 때 그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자식을 잉태한 것이다.

 

나는 이런 에드워드의 열정이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였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열정을 지니고 미래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언제부턴가 쉽게 주저앉고 핑계만 대는 나의 모습과 비교되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영화 속 에드워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라는 일반적 이미지와 굉장히 흡사해 보인다. 에드워드는 자신만의 예술을 하느라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결국 그의 인간적 삶은 무너지지만 후세에도 영원히 남을 불멸의 작품을 만들어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창조해낸다. 영화 속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에드워드는 작업을 진행할수록 광기에 휩싸이고,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차갑고, 에드워드는 고독하게 홀로 서있다.

 

 

왜 항상 예술가, 천재는 광기에 차있을까? 위대한 예술가, 천재의 일반적 인식에는 단명한다는 것과 그들의 최후는 비극적이고, 주변인들은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않으며 홀로 광기에 찬 그들만의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과 과거의 유명한 예술가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부분들이다. 그리하여 요즈음에도 이러한 예술가들의 기행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들의 행태를 도덕적으로 옳은 지, 옳지 않은 지를 따지며 작품의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문제가 되었던 예술가들의 사생활과 아름다운 그들의 작품을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러한 시선은 편견처럼 굳어져 있다. 예술가들의 기행은 예술가니까라는 것으로 단순 치부되며,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사는 예술가들이 대중들에게 특별한 인식을 주지 않고 있으며, 더욱 별난 행동을 하는 예술가들이 후세에 그들의 별난 행동들이 전설처럼 전파되어 대중들에게 특별하게 각인되는 것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심지어는 그들의 만행들이 작품에 밀려 알려지지 않는 것 또한 대다수이다. 일반적으로는 엄연한 범죄이자 잘못된 일이 분명한데 말이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가 비추는 에드워드의 삶과 행동을 보고 예술과 예술가들의 삶은 명확히 분리되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백발 수염이 참 멋있는 사람...

 

나는 고은 시인을 좋아했었다. 그가 시를 통해 전하는 가족 내음새와 시골의 향토가 느껴지는 게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더불어 나는 그의 시를 공부하였으며 그의 삶을 알게 된 뒤로는 더욱 정감이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본모습이 세상에 드러난 뒤 내가 좋아했던 그의 모든 시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표현론적 관점이 있다. 표현론적 관점이란 작가의 삶에 비춘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말하는데 이를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고은의 시를 표현론적 관점으로 배웠던 것에서 말이다.

 

범죄는 범죄고 예술 작품은 하나의 작품에 불과하지 그것을 만든 예술가에게는 면죄부를 주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 어떠한 면책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가 말하는 예술가의 삶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에드워드는 사람을 죽인 살인마이자 유부녀와 바람을 피운 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건조하게 다가간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에드워드의 행동에 어떠한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저 그의 행동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그리하여 감독은 관객이 에드워드라는 사람에게 몰입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에드워드라는 사람에게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으며 에드워드라는 예술가의 삶을 보다 객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떠한 첨가물이나 과장 없이 예술가라는 한 삶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예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불멸의 업적을 세운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라는 인물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영화가 있으며 새로운 영화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예술가란 고독하고 쓸쓸하며 때때로 잊혀 지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있어야 더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 오리라 믿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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