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 - 20대를 위한 청춘토크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보고 들고 만난 사람들 중에서 인생을 가장 본질적으로,

올바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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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중에서 - 개처럼 살아라!

 사랑하던 아이가 속절없이 떠나갔다. 엄마는 아이를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낸다. 해맑게 웃던 아이를 희미한 미소로 떠올리는 순간, 그녀는 그 소중한 보물이 이제 내게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그녀가 과거에 집착하느라 현실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에게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가족이나 친구도 안중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꽃피는 풍경이나 감동적인 영화마저 볼 여력도 없을 것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유년 시절 가난했던 탓인지 어떤 남자는 부와 명성을 쌓을 때까지 모든 열정을 자신의 업무에 쏟아붓는다. 아이를 떠나보낸 여성이 과거에 매몰되어 있다면 이 남자는 미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믈론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가족과 살뜰한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누려야 할 행복을 무한히 연기하고만 있을 뿐이다.


 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의 여자와 남자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삶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삶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죽은 아이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부와 명성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과연 행복이 가능할까? 죽은 아이가 되살아나지 않거나 기대했던 부와 명성이 얻어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활달했던 스님 임제(?~867)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임제어록-


 '이미 일어난 생각'이 기억된 과거를,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기대되거나 염려되는 미래를 의미한다. 임제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는 '지금 그리고 여기' 펼쳐지는 현재의 삶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당연히 현재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임제의 가르침은 단도직입적이다. 현재를 영위하라!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그러면 너희들은 깨달을 것이다! 임제의 가르침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역설한다. "카르페 디엄!" '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임제는 이런 정신을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키팅 선생이나 임제 스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막연하다면, 불교의 깨달음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도록 하자. 어느 스님이 제자를 불러 몽둥이를 휘두르며 물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해보라" 스님은 제자가 깨달았는지, 다시 말해 제자가 현재에 눈을 뜨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자는 어떻게 대답해야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유명한 반야심경을 떠올리면서 제자는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자는 네 대나 맞게 될 것이다. "있다"라는 말을 두 번, "없다"라는 말을 두 번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의 몽둥이 세례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대답하면 스승의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만약 스승이 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몽둥이 세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몽둥이는 있거나 아니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하는데, 이것도 몽둥이 세례의 대상이 된다. 결국 무조건 맞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제자가 스승이 흔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로 마음을 열었다면, 몽둥이 세례를 받지 않을 답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많다. "차 향기가 좋네요" "스님, 법당에 파리가 나네요" "바람이 시원하네요" "목이 말라요" 등등. 바로 이것이다. 몽둥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만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펼쳐져 있는 차 향기, 파리, 바람, 목마름 등등을 향유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이제는 뒤통수를 치는 것처럼 강렬한 임제의 사자후를 들어보자.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승려인 임제는 부처, 조사, 그리고 나한과 같은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승려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피력한다. 부처, 조사, 나한이 되려는 제자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이야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즉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지나친 소망때문에 현재의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나아가 그는 부모와 친척도 만나면 다 죽이라고 역설한다. 출가한 제자들에게 부모와 친척은 마음 깊이 담고 있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부모와 친척으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잇는 자유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임제는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 친척을 만나면, 다시 말해 그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죽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제의 사자후가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실제로 죽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현재의 삶을 가릴 때에만,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죽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자유롭게 된다면,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탈"한다면 우리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만날 때 그 현재적 만남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 끝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긍정이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결국 참된 자유 혹은 참된 해탈은 우리가 타자를 기억이나 기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응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 이제 임제의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오늘부터라도 만나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죽이도록 하자. 현재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중에서, '자유인의 당당한 삶':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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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 크리에이터 박웅현씨의 인생 철학 역시 '카르페 디엠'이다. 그는 그의 철학을 개처럼 사는 것에 비유했다. "개들은 밥을 먹을 때 묵묵히 밥만 먹는다. 밥을 먹으면서 ‘어제 내가 꼬리치기가 서툴렀어’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들여다보고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삶의 목표는 개처럼 사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들의 재구성이며 재구성순간 순간 나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진다. 과거의 똑같은 사건도 지금 나의 심적 상태에 따라 좋은 기억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필요한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억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때문에 머릿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시시각각 변하며 불완전하다. 그래서 과거에 기댄 행복은 불완전하다. 

 미래는 나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대들의 재구성이다. 기대들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운과 우연, 시대적 흐름 등과 맞아 떨어져야만 기대들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운과 우연, 시대적 흐름은 나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영역이다. 때문에 미래의 기대들에 기댄 행복은 언제나 불안하다.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고려 시대 지눌 스님은 돈오점수(깨달음이 있은 후에 점진적인 수행이 이어져야 함)를 이야기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후 필요한 것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이어지는 수행이다. 고로 나는 지금도 도를 닦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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