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광고] '젊음의 5기'......X바! X까!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제작한 '젊음의 5기'라는 광고다. 이 시대의 젊음들에게 꿈을 펼치라는 메시지와 함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5기(용기, 패기, 혈기, 호기, 끈기)를 말하고 있다. 좋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광고다. 대충 검색해봐도 이 광고를 본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용기를 얻었다.','자신감이 생겼다.'등과 같은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광고를 본 나의 반응은......분노와 함께 'X바! X까!'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얼마나 꿈을 못 펼치고 있으면 '꿈을 펼쳐라'라는 광고가 나왔겠는가. '과소비 하지마라','너무 놀지마라'는 광고가 아니라...... 하지만 좋다. 그건 지금 시대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니까 넘어간다 쳐도, 그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서 국가가 내놓은 것이 고작 '젊음의 5기'다. 이건 명백히 국가가 청년들이 안고 있는 문제(실업)를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시대의 젊음들이 꿈(안타깝게도 이제는 꿈이 취업과 동일어가 되어 버렸다)을 이루지 못한 것은 개개인이 5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니 더 열심히 노력해라.','열심히만 하면 니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룰수 있다.' 하지만 실업이 과연 '개인의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실업은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발생한 혁명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 만큼 중대한 사회적 문제다. '젊음의 5기' 광고는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가 얼마나 성의없게 대응하고 있는지, 청년 실업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광고를 보고 용기를 얻는 것은 좋다. 우리에겐 희망과 용기같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래! 나의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거야! 이제부터 '5기'를 갖고 좀 더 노력해야지!' 그러나 상위 1%만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고(그래야만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머지 99%는 어쩔수 없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과연 '젊음의 5기'가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지금 상황에서 단기적이고 획기적인 해결책은 없다. 현실을 들여다 볼수록 더 암울해진다. 하지만 적어도 실패의 모든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부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개개인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리고 있다. 이 광고를 본 어른들은 '거봐! 너희들의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거야!'라고 질타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자기자신에게는 조금 더 관대해지기를 바란다. 


 소수만이 승자가 될 수 있는 구조속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게 더 많을거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이 전부다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자. 내가 처한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고 그에 맞게 전략을 조금씩 수정하면서 노력해 가자.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리고 '젊음의 5기'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ㅋ


-참고도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설정

트랙백

댓글

자기계발 명언 = 맞지만 쓸모없는 말들


간절히 꿈꾸고 노력해라!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크게 생각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라!

용기를 가지고 모험에 뛰어들어라!

.

.

.

자기계발에서 말하는 명언들은 셀수도 없이 많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저러한 말들을 되뇌이며 희망에 차오른다. 그러나 자기계발에서 이야기하는 말들은, 맞지만 쓸모없는 말들이다. 말 자체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사자에게는 사실상 쓸모가 없다.


간절히 꿈꾼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뭘까? 어느 정도로 간절해야 간절히 꿈꿨다고 할 수 있을까?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데, 도대체 그 끝의 정의는 뭘까? 안되더라도 죽을때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는 걸까?......어! 그런데 또다른 격언은 '때로는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쪽에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고,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다.


말의 진짜 의미는 텍스트 그 자체의 뜻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 즉 맥락에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 동일한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가령 '사랑해'라는 말도 친구에게 할 때와 애인에게 할 때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말을 이해할 때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을 토대로 해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유추한다. 그만큼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 맥락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에서 말하는 명언은 맥락이 생략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문장으로만 의미가 전달되기 때문에 맥락이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러한 말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져서 해석이 이루어질 때 생긴다. 가령 내가 '크게 생각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라!'는 명언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지금 나의 상황에 비추어 나만의 기준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나에게 '크게' 생각한다는 의미는 뭘까? 시간의 경우는 10년, 돈의 경우는 10억이면 내가 크게 생각한 걸까? 나에게 '과감하게' 행동한다는 의미는 뭘까? 길에서 지나가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연락처를 물어보는 정도면 나에게 과감한 걸까?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하는 것이 나에게 과감한 걸까?


물론 정답은 없다. 그것은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당사자가 어떤 맥락에 있고, 어떤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즉, 같은 말을 두고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 가치관, 세계관 등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말과 '때로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둘 다 옳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고,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을 배제한채 텍스트만 놓고 보았기 때문에 서로 대치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나는 자기계발 명언들은 맞지만 쓸모없는 말들이라고 했다. 아무리 근사하고 좋은 말이라도 텍스트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다. 그러한 말들이 쓸모가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통해 명언의 의미를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자기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의 세계관을 모른다면, 그 어떤 명언도 쓸모가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명언도 쓸모없는 말에 불과하다. 그러니 명언들을 찾아헤매기 앞서, 자기 자신을 좀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곧 명언들을 좀 더 쓸모있게 활용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긍정의 힘? 개뿔!


 긍정은 좋은 것이다. 여기에 반대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긍정은 좋은 것으로, 부정은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인터넷 서점에서 '긍정'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300여권의 책이 검색된다. 그중 절반 가량이 자기계발서이다. 긍정적인 아이로 키워준다는 동화책도 수십 권이다. 성공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손님이 바로 긍정의 힘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하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X까!

 나는 우리 사회가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긍정'을 싫어한다. 성공의 비결이 긍정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자기계발서에서 이야기하는 긍정을 무조건적으로 믿었다가는 믿는 도끼에 발등만 찍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내가 긍정을 '까는' 것이 곧 내가 부정을 대안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맹목적인' 긍정을 혐오할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 긍정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맹목적인 추종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단지 균형을 잡고 싶을 뿐이다.



 위의 사진에서 물은 '반밖에 없는걸까?' 아님 '반이나 있는걸까?' 정답은 그냥 반이 있는거다. 물론 이 상황에서 반밖에 없다고 불평하는 것보다는 반이나 있다고 긍정하는 것이 낫다. 이 정도의 긍정은 애교로 봐준다. 적어도 물이 반이 남아있다는 객관적 사실은 인지하고 있으니까.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상태에서 조금 더 낫게 바라보는 정도의 긍정이 내가 생각하는 긍정의 마지노선이다.

 


 그럼 이건 어떨까? 당신은 열심히 일했던 회사에서 예고도 없이 해고를 당했다. 그런 당신에게 사회는 말한다. '그것은 당신에게 또다른 기회다!'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여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등등,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무엇인가를 교묘하게 가리고 있다.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가려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AT&T사는 2년 동안 1만 5천명을 정리 해고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한 날 샌프란시스코 직원들을 '성공1994'라는 동기 유발 행사에 보냈다. 행사의 주연급 연사였던 지그 지글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이건 도를 넘어선 긍정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해고를 당한 것이 전부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내가 일자리를 못 구하는 것 역시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러나 긍정은 다 된다고 속삭이고 있다. 전부 나의 생각과 노력만으로 이겨내고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은 곧 안 되면 전부 나의 잘못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니 불평, 불만은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과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조차 가리게 만든다면, 그러한 긍정의 부작용은 심각하다.




 자기최면, 마인드 컨트롤, 생각 조절 등, 자기계발에서 제시하는 강요되고 훈련된 긍정적 사고는 사실 고의적인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그것은 불쾌한 가능성과 부정적인 생각을 억누르고 차단하려는 쉼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참으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통제하거나 검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긍정적 사고는 외부로 향해 있던 경계의 방향을 내부로 돌린 것에 불과하다. 사고가 나거나 일자리를 잃을까봐 걱정하지 말고 그런 부정적인 예상 자체를 경계해 쉼 없이 교정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맹수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들판에서 맹수들을 경계하지 말고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경계해 없애라고 촉구하는 꼴이다.


 역사학자 도널드 마이어가 지적했듯이 긍정적 사고는 기분을 고양시켜 주는 것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불가능에 대한 전망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통제에 반발하는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감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짐에 불과하다. 구명구라도 되는 듯 여기지만 긍정적인 '생각 통제' 노력은 잠재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고, 중요한 정보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치명적인 부담이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 사고도, 부정적 사고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다. 비판적 사고란 본질적으로 회의를 품는 것이다. 어떤 사태에 처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감정의 안경을 쓰고 상황을 왜곡되게 바라보고 받아들이지 않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사고하는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인과관계, 개연성, 우연이라는 자체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인다. 내가 긍정적인 생각만을 한다고 해서 돈이 나에게 끌려오지 않는다. 내가 긍정적인 생각만을 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나아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나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그들 자체의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인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긍정적 사고가 상황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과 개선을 위한 노력조차 가리게 만든다면, 그러한 긍정적 사고는 결국 나의 발등을 찍게될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당신에게 긍정적 사고를 강요한다면, 그것이 나의 객관적인 시선과 개선을 위한 노력을 가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것이 긍정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


<참고도서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설정

트랙백

댓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정의로운 사회는 도덕적 중립의 관점에서 개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려 하는 사회가 아니다. 정의로운 사회란 타당한 도덕적 관점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를 용의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주장이다. , 합리적인 의심과 비판이 있어야 세상이 공정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개념들은 사회구성원의 집단적 사고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왜 그래야만 할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도덕적 관점을 사회 구성원들의 논의를 통해 결정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뭘까?



자연에서 흔히 볼수 있는 장면이다.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을 잡아 먹어야 하는 육식동물, 그리고 역시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하는 초식동물. 많은 이들이 이런 장면을 보고 안타까워 할지도 모른다. 나약한 초식동물을 불쌍히 생각하고 그들을 구해줘야만 될 같은 기분을 느낄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상황에서 옳고 그른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연에 윤리란 없다. 오로지 전략만이 있을 뿐이다. 즉, 옳고 그름 따위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만 생겨날 뿐이다. 자연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최선의 전략을 수행할 뿐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 선과 악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우리 인간 역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생존과 번식을 위한 전략 이상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윤리와 도덕이라는 개념을 발명해 냈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은 시대과 장소에 따라 변화해 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윤리와 도덕은 없다. 본질적으로 자연에는 윤리와 도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도덕적 관점, 즉 무엇이 옳은가를 구성원들간의 논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를 용의하게 하는 사회가 바로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정의로운 사회다.

설정

트랙백

댓글

'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중에서 - 개처럼 살아라!

 사랑하던 아이가 속절없이 떠나갔다. 엄마는 아이를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낸다. 해맑게 웃던 아이를 희미한 미소로 떠올리는 순간, 그녀는 그 소중한 보물이 이제 내게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그녀가 과거에 집착하느라 현실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에게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가족이나 친구도 안중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꽃피는 풍경이나 감동적인 영화마저 볼 여력도 없을 것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유년 시절 가난했던 탓인지 어떤 남자는 부와 명성을 쌓을 때까지 모든 열정을 자신의 업무에 쏟아붓는다. 아이를 떠나보낸 여성이 과거에 매몰되어 있다면 이 남자는 미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믈론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가족과 살뜰한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누려야 할 행복을 무한히 연기하고만 있을 뿐이다.


 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의 여자와 남자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삶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삶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죽은 아이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부와 명성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과연 행복이 가능할까? 죽은 아이가 되살아나지 않거나 기대했던 부와 명성이 얻어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활달했던 스님 임제(?~867)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임제어록-


 '이미 일어난 생각'이 기억된 과거를,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기대되거나 염려되는 미래를 의미한다. 임제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는 '지금 그리고 여기' 펼쳐지는 현재의 삶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당연히 현재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임제의 가르침은 단도직입적이다. 현재를 영위하라!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그러면 너희들은 깨달을 것이다! 임제의 가르침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역설한다. "카르페 디엄!" '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임제는 이런 정신을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키팅 선생이나 임제 스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막연하다면, 불교의 깨달음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도록 하자. 어느 스님이 제자를 불러 몽둥이를 휘두르며 물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해보라" 스님은 제자가 깨달았는지, 다시 말해 제자가 현재에 눈을 뜨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자는 어떻게 대답해야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유명한 반야심경을 떠올리면서 제자는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자는 네 대나 맞게 될 것이다. "있다"라는 말을 두 번, "없다"라는 말을 두 번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의 몽둥이 세례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대답하면 스승의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만약 스승이 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몽둥이 세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몽둥이는 있거나 아니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하는데, 이것도 몽둥이 세례의 대상이 된다. 결국 무조건 맞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제자가 스승이 흔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로 마음을 열었다면, 몽둥이 세례를 받지 않을 답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많다. "차 향기가 좋네요" "스님, 법당에 파리가 나네요" "바람이 시원하네요" "목이 말라요" 등등. 바로 이것이다. 몽둥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만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펼쳐져 있는 차 향기, 파리, 바람, 목마름 등등을 향유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이제는 뒤통수를 치는 것처럼 강렬한 임제의 사자후를 들어보자.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승려인 임제는 부처, 조사, 그리고 나한과 같은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승려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피력한다. 부처, 조사, 나한이 되려는 제자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이야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즉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지나친 소망때문에 현재의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나아가 그는 부모와 친척도 만나면 다 죽이라고 역설한다. 출가한 제자들에게 부모와 친척은 마음 깊이 담고 있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부모와 친척으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잇는 자유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임제는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 친척을 만나면, 다시 말해 그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죽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제의 사자후가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실제로 죽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현재의 삶을 가릴 때에만,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죽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자유롭게 된다면,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탈"한다면 우리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만날 때 그 현재적 만남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 끝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긍정이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결국 참된 자유 혹은 참된 해탈은 우리가 타자를 기억이나 기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응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 이제 임제의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오늘부터라도 만나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죽이도록 하자. 현재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중에서, '자유인의 당당한 삶':임제-


===========================================================



 광고 크리에이터 박웅현씨의 인생 철학 역시 '카르페 디엠'이다. 그는 그의 철학을 개처럼 사는 것에 비유했다. "개들은 밥을 먹을 때 묵묵히 밥만 먹는다. 밥을 먹으면서 ‘어제 내가 꼬리치기가 서툴렀어’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들여다보고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삶의 목표는 개처럼 사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들의 재구성이며 재구성순간 순간 나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진다. 과거의 똑같은 사건도 지금 나의 심적 상태에 따라 좋은 기억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필요한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억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때문에 머릿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시시각각 변하며 불완전하다. 그래서 과거에 기댄 행복은 불완전하다. 

 미래는 나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대들의 재구성이다. 기대들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운과 우연, 시대적 흐름 등과 맞아 떨어져야만 기대들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운과 우연, 시대적 흐름은 나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영역이다. 때문에 미래의 기대들에 기댄 행복은 언제나 불안하다.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고려 시대 지눌 스님은 돈오점수(깨달음이 있은 후에 점진적인 수행이 이어져야 함)를 이야기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후 필요한 것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이어지는 수행이다. 고로 나는 지금도 도를 닦는 중이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