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중에서 - 개처럼 살아라!

 사랑하던 아이가 속절없이 떠나갔다. 엄마는 아이를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낸다. 해맑게 웃던 아이를 희미한 미소로 떠올리는 순간, 그녀는 그 소중한 보물이 이제 내게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그녀가 과거에 집착하느라 현실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에게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가족이나 친구도 안중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꽃피는 풍경이나 감동적인 영화마저 볼 여력도 없을 것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유년 시절 가난했던 탓인지 어떤 남자는 부와 명성을 쌓을 때까지 모든 열정을 자신의 업무에 쏟아붓는다. 아이를 떠나보낸 여성이 과거에 매몰되어 있다면 이 남자는 미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믈론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가족과 살뜰한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누려야 할 행복을 무한히 연기하고만 있을 뿐이다.


 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의 여자와 남자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삶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삶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죽은 아이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부와 명성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과연 행복이 가능할까? 죽은 아이가 되살아나지 않거나 기대했던 부와 명성이 얻어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활달했던 스님 임제(?~867)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임제어록-


 '이미 일어난 생각'이 기억된 과거를,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기대되거나 염려되는 미래를 의미한다. 임제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는 '지금 그리고 여기' 펼쳐지는 현재의 삶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당연히 현재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임제의 가르침은 단도직입적이다. 현재를 영위하라!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그러면 너희들은 깨달을 것이다! 임제의 가르침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역설한다. "카르페 디엄!" '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임제는 이런 정신을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키팅 선생이나 임제 스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막연하다면, 불교의 깨달음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도록 하자. 어느 스님이 제자를 불러 몽둥이를 휘두르며 물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해보라" 스님은 제자가 깨달았는지, 다시 말해 제자가 현재에 눈을 뜨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자는 어떻게 대답해야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유명한 반야심경을 떠올리면서 제자는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자는 네 대나 맞게 될 것이다. "있다"라는 말을 두 번, "없다"라는 말을 두 번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의 몽둥이 세례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대답하면 스승의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만약 스승이 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몽둥이 세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몽둥이는 있거나 아니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하는데, 이것도 몽둥이 세례의 대상이 된다. 결국 무조건 맞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제자가 스승이 흔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로 마음을 열었다면, 몽둥이 세례를 받지 않을 답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많다. "차 향기가 좋네요" "스님, 법당에 파리가 나네요" "바람이 시원하네요" "목이 말라요" 등등. 바로 이것이다. 몽둥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만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펼쳐져 있는 차 향기, 파리, 바람, 목마름 등등을 향유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이제는 뒤통수를 치는 것처럼 강렬한 임제의 사자후를 들어보자.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승려인 임제는 부처, 조사, 그리고 나한과 같은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승려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피력한다. 부처, 조사, 나한이 되려는 제자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이야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즉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지나친 소망때문에 현재의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나아가 그는 부모와 친척도 만나면 다 죽이라고 역설한다. 출가한 제자들에게 부모와 친척은 마음 깊이 담고 있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부모와 친척으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잇는 자유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임제는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 친척을 만나면, 다시 말해 그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죽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제의 사자후가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실제로 죽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현재의 삶을 가릴 때에만,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죽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자유롭게 된다면,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탈"한다면 우리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만날 때 그 현재적 만남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 끝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긍정이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결국 참된 자유 혹은 참된 해탈은 우리가 타자를 기억이나 기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응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 이제 임제의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오늘부터라도 만나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죽이도록 하자. 현재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중에서, '자유인의 당당한 삶':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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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 크리에이터 박웅현씨의 인생 철학 역시 '카르페 디엠'이다. 그는 그의 철학을 개처럼 사는 것에 비유했다. "개들은 밥을 먹을 때 묵묵히 밥만 먹는다. 밥을 먹으면서 ‘어제 내가 꼬리치기가 서툴렀어’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들여다보고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삶의 목표는 개처럼 사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들의 재구성이며 재구성순간 순간 나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진다. 과거의 똑같은 사건도 지금 나의 심적 상태에 따라 좋은 기억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필요한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억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때문에 머릿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시시각각 변하며 불완전하다. 그래서 과거에 기댄 행복은 불완전하다. 

 미래는 나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대들의 재구성이다. 기대들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운과 우연, 시대적 흐름 등과 맞아 떨어져야만 기대들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운과 우연, 시대적 흐름은 나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영역이다. 때문에 미래의 기대들에 기댄 행복은 언제나 불안하다.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고려 시대 지눌 스님은 돈오점수(깨달음이 있은 후에 점진적인 수행이 이어져야 함)를 이야기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후 필요한 것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이어지는 수행이다. 고로 나는 지금도 도를 닦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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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1%의 우연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미국의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은 1900년대 초 심리학 역사에 길이 남을 실험을 시작했다. 터먼은 전세계에서 사용하는 표준형 IQ검사인 스탠퍼드-비네을 만든 학자다. 터먼은 IQ가 135이상인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아이들 1500명의 삶을 1928년부터 기록해 나갔다. 각 아이들마다 서류철을 하나씩 만들어 그 안에 아이들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했다. 아이들의 건강, 성품, 관심사, 집안의 관계, 심지어 부모가 소유한 책(평균 300권) 등등, 기록은 아이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선택된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정기적으로 그들의 상태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성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달 수입은 얼마인지, 결혼 생활은 행복한지 등등이 체크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삶을 그리도 자세히 조사하고 기록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터먼은 왜 그런 실험을 실시했을까?


 터먼은 IQ의 신봉자였으며 날카로운 이성이 인간이 소유한 가장 가치있는 특성이며, 인생의 경로는 예측 가능한 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증명하고자 실험을 실시한 것이다. 그는 지능이 삶의 성공을 좌우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라고 확신했다. 만약 그의 믿음이 옳다면 실험대상이 된 아이들이 그것을 증명해 줄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인생의 경로를 예측할 수 있다는 터먼의 꿈은 날아가버렸다.


 아이들 중에는 헐리웃 스타도 있었고 학자도 있었으며 유명한 언론인도 있었다. 터먼의 아이들은 열 명 중  한명 꼴로 유명인이 되었다. 그러나 노벨상이나 퓰리처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재들의 수입은 미국인 평균보다 높았으며 건강 상태도 평균 이상이었고 자살률은 평균보다 낮았다. 그러나 그들에 관한 서류들에는 심리학자들의 기대에 맞지 않는 운명들이 너무 많이 기록되어 있었다. 좌절하거나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다. 경찰, 타일공, 청소부 등 영재성이 특별히 요구되지 않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능은 결코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공에 있어 중요한 것은 타고난 지능이 아니라 노력이다!' 라는 감동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고 싶지만, 그것 역시 개뿔! 헛소리다! 에디슨의 명언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를 두고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99%의 노력도 1%의 영감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애초부터 물이 없는 곳을 죽어라 판다고 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1%의 영감'을 무엇으로 해석하든지 간에 에디슨 명언의 진짜 의미는 이렇다고 생각한다. '99% 노력의 결과는 1% 영감에 의해 결정된다.'





 루이스 터먼의 사례를 가지고 에디슨의 명언을 살짝 바꿔보겠다. '인생은 1%의 우연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즉 우리의 인생은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99%만큼 노력해도 그 결과는 1%의 우연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좀 우울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핵심은 우리의 노력이 우연이라는 녀석때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거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전에 한 가지 짚고 가자. 위의 터먼의 사례를 보고 터먼이 지능에만 국한해서 연구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의 여성 사회학자 캐럴 톰린슨과 제시카 고멜은 이런 의문을 가지고 다시 한번 터먼의 자료들을 가지고 연구에 들어갔다. 그들은 집안, 유년시절, 인격, 목표 등 성공을 예측하는 13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지능이 아니라면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을 종합해서 인생의 경로를 예측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적이었다. 삶의 목표, 사교성 등이 어느 정도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론적으로 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던 터먼의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자신이 머나먼 삼국시대 어느 산골 마을에서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그 시대에는 옆 마을에 가는 것조차 어려웠고 대부분의 삶이 그 마을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을에서 지냈을 것이다.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난 나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무꾼이 되어 생계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이 마을에서 최고의 나무꾼이 될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삶의 반경이 극히 제한적인만큼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 나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충분히 예상가능하며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우연의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자. 가령 자신이 친구와 만날 약속을 하고 길에서 만난다면 놀라지 않겠지만, 약속하지 않은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놀라워 한다.


 이제는 자신이 지금의 시대에 중소기업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전세계 1등 회사가 될 꿈에 부풀어 있다. 그 꿈을 위해 하루 18시간씩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경쟁사들이 속속 시장에 진입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세계 글로벌 회사들이 한국 시장을 잠식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었다. 고전을 거듭하면서도 치열하게 노력해서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정책이 바뀌어 그동안 받아왔던 혜택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재료를 수입해 오던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재료 수입에 큰 차질이 생겼다. 거기다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해 은행 대출도 더이상 어려워졌다. 결국 회사는 파산했다.


 회사 파산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은 뭘까? 물론 알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노력과는 별개로 너무 많은 우연들(의도하지 않은 일)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우연들 때문에 노력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과거 나무꾼의 삶과 지금의 삶에서 우연의 역할 차이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



 

 당구대 위에 공들이 굴러다니지만 각각의 공별로 구역이 제한되어 있다. 자신에게 할당된 구역만 굴러다닐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공과 만나는 일(우연)은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의 삶은 이와 비슷했다. 자신의 삶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자신의 삶의 모습이 예측 가능했다. 어디서 태어나는지에 따라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종류도 제한되었고, 결혼 상대자의 물망에 올릴 수 있는 신붓감 또는 신랑감의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연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적었고, 자신의 노력에 따른 결과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위의 당구대에는 경계가 없다. 모든 공들은 어디든지 굴러갈 수 있다. 그래서 다른 공과 만나는 일(우연)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지금의 삶은 이와 비슷하다. 이제는 전세계 어디서든지 일할 수 있고, 전세계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기술의 발달로 노동 구조도 변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기업이 지구 반대편 경쟁기업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몰락할 수도 있다. 사스나 에이즈 같은 전에 없던 전염병들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즉각적으로 전세계 나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경계가 허물어진 지구 위를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며 저마다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수십 년 전 헤어진 친구를 지구 반대편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고, 지구 반대편을 여행하다 '우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연결되는만큼 더 많은 우연들이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 이제는 한 사람의 삶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또한 노력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복잡성과 우연이 증가하는만큼 가능성(기회) 또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골마을에 태어났다고 해서 한평생 그곳에서 살 필요도 없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서 농부가 될 필요도 없다. 한국에 태어났다고 한국에서만 살 필요도 없다. 일례로 현재 나의 가장 큰 수입원은 '프레지(Prezi)'라는 툴을 사용한 프레젠테이션 제작 서비스이다. 지구 반대편 헝가리의 한 벤처 회사가 만든 프로그램이 나에게 돈을 벌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나의 재능과 노력이 있었지만 먼저 '프레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우리의 인생은 1%의 우연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1% 우연이 99% 노력의 결과를 결정한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에 그만큼 우연의 역할이 커져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99%의 노력을 쏟는만큼 그 노력의 결과를 좌지우지할 우연에 열려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러한 변화로 인해 나에게 다가올 우연, 그리고 그 우연과 함께 찾아올 기회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살피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서 우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연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 흥미진지하다. 


<참고도서 - '우연의 법칙' 슈테판 클라인, 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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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법칙'은 사기다!



법칙 :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필연적 불변의 관계



 언제 어디서든 어떠한 원인에 항상 같은 결과가 따라오면 우리는 그것을 법칙이라고 부른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지구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땅으로 떨어진다. 잘생긴 사람이 떨어뜨린다고 해서 물건이 하늘로 솟구치지는 않는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관계, 그것이 바로 '법칙'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하는 '성공의 법칙'은 어떨까? 성공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할까? 성공학을 전파하는 수많은 자기계발 강사들이 침이 튀도록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니 일단 믿어보자. 성공의 법칙에서 원인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노력'이다. 물론 수많은 원인들이 존재하지만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노력이다. '간절히 꿈꾸고 노력하면 다 된다!' 이것이 성공의 법칙의 핵심이며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메시지다.


 그렇다면 노력이라는 '원인'과 성공이라는 '결과' 사이에 과연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러한 관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법칙이고, 아니면 그것은 법칙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해보니 그들의 성공 원인은 한결같이 노력이었다. 따라서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논리는 아주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성공이 주어지는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성공한 사람들만을 보고 그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그들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성공의 법칙'이 진짜 법칙이 되려면 위 표의 나머지 영역 모두에서도 법칙이 성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법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기다. 물론 검증은 불가능하다.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꼬리표가 붙으니까. 


 나는 성공에 있어 노력이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확신한다. 노력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도 확신한다. 내가 굳이 이렇게 태클을 거는 이유는 성공의 법칙을 전파하는 강사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의 법칙을 확신한다면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야가 좁거나, 진짜 사기꾼이거나. 


 만약 자신이 치열한 노력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거나, 또는 그러한 사람들만을 만나왔다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성공의 법칙을 좋은 의미에서 나누고 싶어할 것이다. 그들의 선한 의도를 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부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명성을 위해 성공의 법칙을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사기꾼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천만의 말씀! 현실을 외면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위험하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낭떠러지가 눈앞에 있는데 간절히 꿈꾸면 건널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게 양 극단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반대쪽에 서야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대 극단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쪽에 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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